[기고]우암문화제 , 대전시의 문화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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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우암문화제 , 대전시의 문화자랑
  • 송윤영 기자
  • yaho1130@hanmail.net
  • 승인 2022.10.13 2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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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익 정치학 박사
송재익 정치학 박사
(사)국가발전정책연구원 부원장

26회 우암문화제가 2022년 10월 22일부터 23일까지 대전광역시 동구에 위치한 우암사적공원 내에서 개최된다.

오는 22일 11:00시에는 우암 송부자(송시열 선생) 탄신 415주년 추향제(秋享祭)가 거행된다. 우암문화제와 추향제는 동구문화원과 남간사 유회 주최로 우암문화제 추진위원회 주관으로 진행된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17세기 성리학의 전통을 이은 대학자요, 정치가이며, 사상가였으며, 특히 우암 선생은 배운 지식을 나라와 백성 복리를 위해 힘쓴 경세가였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이며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아버지 송갑조(宋甲祚)로부터 “주자는 후대의 공자이고, 율곡은 후대의 주자이니 공자를 배우려면 율곡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우암 선생은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사계 사후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의 문하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따라서 학문을 부국강병과 백성의 복리증진을 위해 노력한 율곡 이이,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로 내려오는 기호학파의 맥을 이어온 17세기 대학자로서 이후 19세기 초까지 학문적, 정치적 영향력을 조선 후반기 미쳤던 역사적 인물이다.

우암은 공자의 정신과 주자의 사상을 계승했다. 공자가 주나라의 문화와 정신을 존중한 것처럼 우암 역시 주나라의 대의를 존중하는 자세를 가졌다.(尊周大義) 『논어』에서 공자는 배워서 알고 실제적으로 실현 가능한 학이지지(學而知之) 하는 인간상을 제시하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가는 것을 추구하였는데 우암 역시 학문 즉 배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우암의 정신을 알려주는 우암사적공원 안내실에 직(直)과 치(恥) 붓글씨 서체를 볼 수 있다. 두 글자는 우암의 철학과 일관된 삶을 나타내는 것으로 먼저 직은 정직·곧음·바름을 뜻한다. 『논어』 「옹야」 편에 “사람이 사는 도리는 직이다. 직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것은 요행히 화를 면하는 것일 뿐이다.”(人之生也直 罔之生也 幸而免)라고 하고 있다. 이런 직의 사상은 송대 주자로 이어지며 주자가 임종할 때 문인들에게 마지막으로 고한 말이었다.

치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으로 『중용』에서 “부끄럼을 아는 것은 용기에 가깝다.”(知恥近乎勇)라고 하였다. 우암은 치를 병자호란 당시 오랑케인 청나라에 굴복한 것을 가장 큰 수치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효종의 북벌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북아 국제정세는 만주에서 발흥한 후금은 청으로 개명(1636)하며 조선을 굴복시키고 이어 명나라를 점령(1644)하여 중원을 차지하였다. 세가 한창 오르는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효종의 북벌에 반대라기보다는 의지를 성실히 하는 성의(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는 정심(正心)을 가지고 몸을 닦고 준비하는 수신(修身)하며 힘을 기르고 때를 기다리라고 군주에게 간하기 하였다.

우암은 효와 예학을 중요시 하며 실천하였다. 효를 바탕으로 하는 인·의·예·지 선현들의 예절에 깊이 심취하며, 먼저 우암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시집가는 딸에게 지켜야 할 도리를 한글로 써서 주었었는데 계녀서(戒女書)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예(禮)를 사회적으로 보편화 하고 유통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여 우암은 스승인 사계가 강조한 『소학』과 『가례』를 존중하며 검신과 의례의 바탕으로 삼아 예의 생활화를 몸소 실천하였다.

현대에서 우암 선생을 주자를 신봉한 학자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암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와 같은 학자로서 꿈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이는 주자라는 대학자의 학문을 이어받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형편이 주자가 살았던 송나라의 사정이나 우암이 살던 조선의 상황이 비슷하였기 때문으로 우암은 이런 동북아 국제정세와 조선의 국내정세를 이해하여 어떻게 하면 나라를 바로 세우고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따라서 우암은 공자와 주자의 사상을 계승하되 경세가로서 실천하였다. 1635년 인조 3년에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배향을 청하고, 1682년 숙종8년에 율곡과 우계의 문묘종사를 이루었고, 단종 때 희생된 사육신의 유허비(遺墟碑)를 세워주었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700 의사와 함께 순국한 조헌의 묘비를 세우고, 문집을 간행하는 등 충신들의 후손들에게 거주지를 옮겨 다니는 자나 살기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등 이들의 등용을 청하는 상소로 의(義)를 실천하였다.

정치학을 배운 필자로서 우암 선생을 생각할 때, 모든 역사의 인물은 공과가 있기 마련이다. 단순히 당쟁시대 노론의 당수로서 비판하기보다는 당시의 정치상황을 알고 비판하고 공과를 이해하였으면 한다. 우암은 학자로서 정치가로서 살면서, 학자로서는 공자와 주자를 따랐고 특히 주자의 대학자가 되려고 노력하였으며 조선의 성리학으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정치가로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경험하며 다시는 굴욕적인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바른 정치를 통해 나라를 위해 희생된 충신들을 기리고 후손들을 제대로 대우하도록 실천하였다. 그리고 군주로부터 신하 및 중간 관리자 그리고 백성들까지 자기 맡은 바를 충실히 하는 수신제가치국을 위해 후학들을 교육하고 자신도 실천하는 모범을 보였다. 이제 우리사회는 코로나 사태를 국민들이 단결하여 극복하고 일상생활로 돌아가며 우암문화제가 10월 22일에 개최된다. 맑을 가을 날씨에 가족들이 우암사적공원으로 나들이하여 추향제 및 문화제를 보며 우리 전통문화를 알고 우암 송시열 선생에 대한 생각을 해보는 것도 대전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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